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다쓰 덴노 (문단 편집) == 백제와의 관계 == 비다쓰 덴노와 관련해서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 경 편찬. 11세기 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음.]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비다쓰 덴노의 [[백제]] 관련 행적들이다. 비다쓰 덴노의 손자가 '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신찬성씨록]]》이라는 일본의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비다쓰의 손자인 '백제왕'은 제34대 [[조메이 덴노]]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이 통사에는 >'''“비다쓰 덴노가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 고 쓰여져 있다. 비다쓰 덴노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천황들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없었는데 비다쓰 덴노가 최초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왜국|왜]]와 [[백제]]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비다쓰 덴노가 백제 왕궁을 지었던 [[나라현|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애초에 백제계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었기에 비다쓰 덴노는 그의 궁궐인 '백제 왕궁'을 당당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다. 이는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이 [[나라현|나라]] 지역에서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참고로 33대 [[스이코 덴노]]의 남편이었던 비다쓰 덴노만 '백제 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후대 천황 또한 ‘백제 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 덴노|조메이]](舒明, 629~641년 재위)덴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일본서기》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고 전하고 있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파일:HD역사스페셜023[051014]백제대사 (1).jpg]] [[파일:HD역사스페셜023[051014]백제대사 (2).jpg]] [[http://enjoyjap.egloos.com/1960047|출처]]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조메이 천황은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천(百濟川) 근처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고 기록한 일이다. 비다쓰 덴노의 친손자인 [[조메이 덴노]]가 '백제 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었다. 즉, 조메이 덴노가 나라 지방 백제천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조메이 덴노 또한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조메이 덴노가 지은 9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드디어 ‘백제 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 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조메이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 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 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 >《大化改新の 眞相》. 1967. 즉, 당시 왜국에 거주하고 있던 백제계 도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